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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북송 사업 피해자로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씨가 2019년 다시 찾은 니가타(新潟) 항. 그곳은 1960년 그가 귀국선을 탔을 때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300 m 길이의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은 북송선을 연상시켰습니다. 당시 니가타시는 북송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니가타항 주변 도로 양측에 버드나무를 500 그루 가량 심기도 했습니다. 북송사업은 지금도 ‘버드나무 도리(길)’이라는 명칭이 쓰일 정도로 25년간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북한에서 43년 만에 탈출한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2019년 11월 니가타(新潟)를 다시 수입정품 찾아 아직도 남아 있는 북송사업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니가타현 조총련 본부와 조선인귀국협력회가 니가타항 근처에 북송사업을 기념하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도리'로 불린다. /이하원 기자
가와사키씨가 니가타에 와서 미군이 남기고 간 합숙소에서 며칠을 보낸 후 탄 북송선은 만경봉호가 아니라 소련 sbi모기지 국적의 배였습니다. 그는 북송 초기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이승만 정권을 의식해 소련 배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북송 사업에 강하게 반대, 공해상에서 북송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그런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 소련 배를 투입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련 배는 (한국 군함이 막아서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부천파산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동안 동해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북한에 있었던 세월이 원망스러운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여기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 수 있는 마지 시중은행금리인상 막 기회를 놓쳤던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기 전날 국제적십자사의 곱게 생긴 스위스 출신 여성이 나를 심사했습니다.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질문이 전부였습니다. 1분도 채 안 걸렸습니다.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겁니다.”
◇ “재일교포들을 지옥에 보내는데 일조했다”
nh채움모기지론 니가타항을 나와서 가와사키씨의 안내로 한 일본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小島晴則·당시 88세)씨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자가 북송사업 60주년을 취재하러 온 것에 대해 놀라며 회한(悔恨) 섞인 얘기를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는 순간 재일교포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된 겁니다. 당시는 모든 일본 신문과 TV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서 그것을 몰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구야미(뉘우침, 후회라는 의미의 일본어)’가 있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씨가 2019년 11월 인터뷰에서 "내가 재일교포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고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그는 이런 마음을 담아 2016년 북송 사업이 진행되던 현장을 알린 ‘귀국자 9만3000여명 최후의 이별’이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출간했습니다. 공산당원이던 그는 젊었을 때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의 니가타 지부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니가타협력회 뉴스’의 실질적인 편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한 달에 세 차례가량 귀환 사업 관련 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니가타항에서 떠나는 이들을 사진 찍고, 기사 쓰고 약 5000부를 찍어서 각계에 보냈습니다.”
고지마씨가 변한 것은 1960년대 3주간 북한을 방문한 뒤부터입니다. “북한 체제는 잘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가서 만나보니 모두 영양실조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귀국협력회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공산당에서도 탈당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북한에 의해 납치된 여중생 메구미 구출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일본 사회에서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편집했던 신문과 사진을 모아서 자료집을 냈습니다.
고지마씨는 “귀환 사업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 처와 자녀 6000여명도 관련된 일”이라며 “일본인 납치 문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9만명이 지옥에 있는 것을 모른 척하면 아베 총리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베 신조 총리가 북송 사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납북자 문제에만 매달린 것을 비판한 겁니다.
◇국가적 사기극 북송사업 25년간 계속돼
가와사키씨와 고지마씨의 증언대로 올해로 시작된 지 65주년을 맞는 ‘북송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제 사기극이었습니다. 1959년부터 25년간 북송된 9만3340명은 최소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습니다. 이중엔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 있었습니다.
북송 사업이 시작될 당시 김일성 북한 정권은 재일교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재일교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 일본 체제는 “식민지배에 원한을 가진 한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일본 땅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다”는 판단하에 북한의 ‘귀환사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일본의 공산당부터 자민당까지, 일본의 언론 매체와 사회단체까지 나서서 재일교포를 북한에 보내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사업에 앞장섰습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외교력을 총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959년 12월 귀국선이 처음 니가타현의 니가타항을 출발할 당시에는 소련 선박 두 척이 동원됐고 5만여 명이 모여 북송 사업을 축하했습니다. 이후 만경봉호가 니가타항과 청진항을 오가며 재일교포를 실어 날랐습니다. 북송된 재일교포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 문제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표면화된 적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북송 사업의 파장 확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일본 법원, 2심에서 관할권 인정
일본 정부뿐 아니라 법원도 이들의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는데, 2018년 8월 가와사키씨 등 5명이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5억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도쿄특파원이었던 저는 북송사업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인 변호사들로부터 일본 법원 내부의 기류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통상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2009년 제정된 ‘대(對)외국 민사(民事)재판권법’에 의해 북한은 미승인 국가로 ‘국가면제’를 받을 수 있는 외국에 해당하지 않아 재판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북한이 사기행위로 재일교포를 데려간 후 출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납치이기에 민법상 불법행위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억류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 부모가 2018년 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인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 법원은 김정은 정권의 책임을 물어서 5억달러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역사적인 첫 재판 2021년 열려
2014년 10월 14일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대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 에이코(중앙) 등 원고와 지지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재판정으로 가고 있다./최은경 특파원
이런 분위기속에 2021년 10월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와사키씨 등 북송사업 피해자 5명이 김정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약 3년 만에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북한이 국제법상 주권 면제 조항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최은경 조선일보 특파원에 따르면 가와사키씨는 북에 남겨둔 가족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떨군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탈출한 후, 북한에 남았던 손자는 살해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북송 사업으로 건너간 9만여 명 대다수는 정신적인 충격, 빈곤, 정치범 수용소 생활 등으로 사망했지만 그 자녀와 손주 수십만 명이 살아있다”며 “이들이 목숨을 건 탈북을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같은 호소에도 2022년 3월 1심에서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서 발생한 억류와 관련한 재판 관할권이 일본에 없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해 10월 30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심에서 관할권이 없다는 원심판결을 깨고 1심 법원인 도쿄지방재판소에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북한의 행위는 전체를 하나의 계속된 불법행위로 봐야 하기 때문에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올해 9월 한국 법원 처럼 일본 법원도 북한의 인권 침해 사실을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9월 북송재일교포협회 이태경 대표 등 탈북민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인정, 손해 배상을 명령한 바 있습니다. 부디 일본 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나와 가와사키씨 등 북송 사업 피해자들이 작은 위로를 받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 P.S. ]
1. 2018년 8월 가와사키씨를 처음 만나 인터뷰할 때는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과 6월에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각각 만나 회담한 직후였습니다. 남북, 미북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황에서 가와사키씨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지금(2018년 8월) 남한과 북한은 화해 분위기인데.
“(쓴 웃음을 지으며)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 김정은이 지금 대화에 나온 것은 북한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유엔의 제재가 자신들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외국 제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북한이 어려울 때 문재인 대통령이 계속 러브콜을 보내자, 당 간부들이 ‘남조선을 이용하자’고 해서 시작된 게 이번 국면의 본질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체제가 어울릴 수 있나.”
가와사키씨는 당시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오는 상황의 핵심을 짚어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에게 ‘사기’ 당하던 사태의 본질을 북한 체제에서 40년 넘게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겁니다. 북한은 언젠가 또 다시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며 표변할 수도 있는데, 가와사키씨를 비롯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 피해자로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씨가 2019년 다시 찾은 니가타(新潟) 항. 그곳은 1960년 그가 귀국선을 탔을 때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300 m 길이의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은 북송선을 연상시켰습니다. 당시 니가타시는 북송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니가타항 주변 도로 양측에 버드나무를 500 그루 가량 심기도 했습니다. 북송사업은 지금도 ‘버드나무 도리(길)’이라는 명칭이 쓰일 정도로 25년간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북한에서 43년 만에 탈출한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2019년 11월 니가타(新潟)를 다시 수입정품 찾아 아직도 남아 있는 북송사업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니가타현 조총련 본부와 조선인귀국협력회가 니가타항 근처에 북송사업을 기념하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도리'로 불린다. /이하원 기자
가와사키씨가 니가타에 와서 미군이 남기고 간 합숙소에서 며칠을 보낸 후 탄 북송선은 만경봉호가 아니라 소련 sbi모기지 국적의 배였습니다. 그는 북송 초기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이승만 정권을 의식해 소련 배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북송 사업에 강하게 반대, 공해상에서 북송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그런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 소련 배를 투입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련 배는 (한국 군함이 막아서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부천파산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동안 동해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북한에 있었던 세월이 원망스러운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여기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 수 있는 마지 시중은행금리인상 막 기회를 놓쳤던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기 전날 국제적십자사의 곱게 생긴 스위스 출신 여성이 나를 심사했습니다.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질문이 전부였습니다. 1분도 채 안 걸렸습니다.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겁니다.”
◇ “재일교포들을 지옥에 보내는데 일조했다”
nh채움모기지론 니가타항을 나와서 가와사키씨의 안내로 한 일본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小島晴則·당시 88세)씨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자가 북송사업 60주년을 취재하러 온 것에 대해 놀라며 회한(悔恨) 섞인 얘기를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는 순간 재일교포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된 겁니다. 당시는 모든 일본 신문과 TV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서 그것을 몰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구야미(뉘우침, 후회라는 의미의 일본어)’가 있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씨가 2019년 11월 인터뷰에서 "내가 재일교포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고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그는 이런 마음을 담아 2016년 북송 사업이 진행되던 현장을 알린 ‘귀국자 9만3000여명 최후의 이별’이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출간했습니다. 공산당원이던 그는 젊었을 때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의 니가타 지부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니가타협력회 뉴스’의 실질적인 편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한 달에 세 차례가량 귀환 사업 관련 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니가타항에서 떠나는 이들을 사진 찍고, 기사 쓰고 약 5000부를 찍어서 각계에 보냈습니다.”
고지마씨가 변한 것은 1960년대 3주간 북한을 방문한 뒤부터입니다. “북한 체제는 잘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가서 만나보니 모두 영양실조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귀국협력회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공산당에서도 탈당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북한에 의해 납치된 여중생 메구미 구출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일본 사회에서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편집했던 신문과 사진을 모아서 자료집을 냈습니다.
고지마씨는 “귀환 사업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 처와 자녀 6000여명도 관련된 일”이라며 “일본인 납치 문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9만명이 지옥에 있는 것을 모른 척하면 아베 총리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베 신조 총리가 북송 사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납북자 문제에만 매달린 것을 비판한 겁니다.
◇국가적 사기극 북송사업 25년간 계속돼
가와사키씨와 고지마씨의 증언대로 올해로 시작된 지 65주년을 맞는 ‘북송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제 사기극이었습니다. 1959년부터 25년간 북송된 9만3340명은 최소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습니다. 이중엔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 있었습니다.
북송 사업이 시작될 당시 김일성 북한 정권은 재일교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재일교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 일본 체제는 “식민지배에 원한을 가진 한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일본 땅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다”는 판단하에 북한의 ‘귀환사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일본의 공산당부터 자민당까지, 일본의 언론 매체와 사회단체까지 나서서 재일교포를 북한에 보내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사업에 앞장섰습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외교력을 총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959년 12월 귀국선이 처음 니가타현의 니가타항을 출발할 당시에는 소련 선박 두 척이 동원됐고 5만여 명이 모여 북송 사업을 축하했습니다. 이후 만경봉호가 니가타항과 청진항을 오가며 재일교포를 실어 날랐습니다. 북송된 재일교포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 문제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표면화된 적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북송 사업의 파장 확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일본 법원, 2심에서 관할권 인정
일본 정부뿐 아니라 법원도 이들의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는데, 2018년 8월 가와사키씨 등 5명이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5억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도쿄특파원이었던 저는 북송사업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인 변호사들로부터 일본 법원 내부의 기류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통상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2009년 제정된 ‘대(對)외국 민사(民事)재판권법’에 의해 북한은 미승인 국가로 ‘국가면제’를 받을 수 있는 외국에 해당하지 않아 재판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북한이 사기행위로 재일교포를 데려간 후 출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납치이기에 민법상 불법행위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억류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 부모가 2018년 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인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 법원은 김정은 정권의 책임을 물어서 5억달러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역사적인 첫 재판 2021년 열려
2014년 10월 14일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대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 에이코(중앙) 등 원고와 지지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재판정으로 가고 있다./최은경 특파원
이런 분위기속에 2021년 10월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와사키씨 등 북송사업 피해자 5명이 김정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약 3년 만에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북한이 국제법상 주권 면제 조항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최은경 조선일보 특파원에 따르면 가와사키씨는 북에 남겨둔 가족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떨군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탈출한 후, 북한에 남았던 손자는 살해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북송 사업으로 건너간 9만여 명 대다수는 정신적인 충격, 빈곤, 정치범 수용소 생활 등으로 사망했지만 그 자녀와 손주 수십만 명이 살아있다”며 “이들이 목숨을 건 탈북을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같은 호소에도 2022년 3월 1심에서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서 발생한 억류와 관련한 재판 관할권이 일본에 없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해 10월 30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심에서 관할권이 없다는 원심판결을 깨고 1심 법원인 도쿄지방재판소에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북한의 행위는 전체를 하나의 계속된 불법행위로 봐야 하기 때문에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올해 9월 한국 법원 처럼 일본 법원도 북한의 인권 침해 사실을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9월 북송재일교포협회 이태경 대표 등 탈북민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인정, 손해 배상을 명령한 바 있습니다. 부디 일본 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나와 가와사키씨 등 북송 사업 피해자들이 작은 위로를 받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 P.S. ]
1. 2018년 8월 가와사키씨를 처음 만나 인터뷰할 때는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과 6월에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각각 만나 회담한 직후였습니다. 남북, 미북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황에서 가와사키씨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지금(2018년 8월) 남한과 북한은 화해 분위기인데.
“(쓴 웃음을 지으며)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 김정은이 지금 대화에 나온 것은 북한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유엔의 제재가 자신들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외국 제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북한이 어려울 때 문재인 대통령이 계속 러브콜을 보내자, 당 간부들이 ‘남조선을 이용하자’고 해서 시작된 게 이번 국면의 본질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체제가 어울릴 수 있나.”
가와사키씨는 당시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오는 상황의 핵심을 짚어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에게 ‘사기’ 당하던 사태의 본질을 북한 체제에서 40년 넘게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겁니다. 북한은 언젠가 또 다시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며 표변할 수도 있는데, 가와사키씨를 비롯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