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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스웨덴 피엘라벤 클래식 때 '하생이 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하승민씨와 정선희씨 커플을 만났다. 하생이는 하승민씨가 키우는 반려견의 이름이다. 이들은 백패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13살의 노견인 하생이를 데리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는 열혈 백패커들이다. 산에서 처음 만나는 백패커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들은 나에게 항상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는다. 대화의 끝은 대부분 "부럽다!"로 끝난다. 하지만 이들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날 것처럼 파고든다. 그러니 얘기해 주는 나도 신바람이 난다. 하생이 형 커플은 다음 대전 집값 해외 원정지를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로 정해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을 목적으로 종주 트레킹을 하고 있다.
그들과 카톡을 주고받던 중 전에 다녀온 낚시 백패킹 얘기를 했다. 섬으로 떠나는 백패킹은 장점이 많다. 낚시와 트레킹을 동시에 할 수 있다. 24시간 동안 온종일 섬을 누비는 것이다. 낚시를 해보고 싶다던 청약저축이란 하생이 형 커플을 위해 낚시 백패킹을 계획했다. 며칠 전 강북 5산 불수사도북 종주를 마치고,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한 숨 쉬어 갈 겸 작은 섬 장도로 떠나기로 했다.
남해에는 여러 개의 장도가 있다. 그중에서도 완도 옆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가 있는 장도는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다. 우리가 가려는 장도는 전혀 다른 섬이다. 완도에서 이신폰 청산도를 거쳐 들어가는 작은 섬이다. 청산도에서 배를 갈아타면서 장도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쳐 여서도나 다른 섬으로 목적지를 바꿔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도는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다. 바닥이 넝쿨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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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항구에서 내려 야영 터로 가는 중. 인적이 없어 숲에 거미줄이 많았다.


장도는 풍력발전소 건설계획으로 그나마 있던 주민들이 떠나고 이제는 3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고 들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 부산국민주택 객선을 탈 일이 없고, 그나마 갯바위 낚시객들만 배를 이용할 텐데, 바로 옆에 여서도가 있으니, 장도로 입도하는 손님들은 드물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장도에 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승선 후 백팩을 내리고, 선상에서 배 값을 지불하려고 했다. 청산도에서 막 출발하려는 배 위에서 장도로 간다는 말에 아저씨는 버럭 화를 냈다.
"장도로 가면 미리 말을 했어야죠!"
"배표를 이제 사니까 지금 말씀 드리죠."
아저씨의 짜증 섞인 퉁명스러운 말투에 주눅이 들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저씨는 미안했는지, 그제야 언성을 낮추고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해 줬다.
"장도는 들어가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때문에 미리 말을 해줘야 해요. 그럼 차를 실을 때도 순서가 바뀌니까 다시 빼고 넣고 번거로워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들어가게 되면 미리 말씀 드릴게요."
"장도까지는 10분 정도 걸려요!"
아저씨도 기분이 풀렸는지 명쾌하게 얘기해 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장도 항구로 가는 중. 하승민, 정선희씨 커플과 여행을 함께 떠났다.


11월 중순이지만 바람은 찬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수온이 높을까 봐 슬쩍 걱정이었다. 장도는 수온이 낮아지면 감성돔이 잘 잡힌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잡어만 잡힐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우리는 낚시꾼보다는 산꾼이니까 잡어라도 손맛만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장도항에 내려 마을을 바라보았다. 너덧 채의 집 뒤로 울창한 숲이 보였다. 아니 거대한 칡넝쿨에 잠식당한 숲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가까이 가보니, 넝쿨 안에는 대나무와 동백나무가 있었다. 우거진 넝쿨을 지나 해변을 따라 이어진 좁다란 길로 들어갔다. 10분 남짓 걸어 들어가자 널찍한 갯바위가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야영지였다. 낚시가 안 돼도 하룻밤을 보내기에 충분히 아늑한 장소였다.
거미줄을 헤치며 섬 탐험
평평한 자리를 골라 텐트를 쳤다. 기온은 20℃를 웃돌았다. 바람이 없는 건 좋지만, 강렬한 햇빛 때문에 여름 날씨 같았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다들 피곤해 보였다. 낮잠을 자기로 했다. 어차피 한낮에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한증막 같은 텐트 안에 누울 자신이 없어서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좁다란 길로 되돌아가 마을 뒤편에 다다랐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밭 길로 갈라졌다. 밭 길은 기다란 섬을 따라 이어졌다. 밭은 확실하지만 농작물은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았다. 이쯤 되면 섬사람들은 농작은 포기한 듯 했다.



텐트를 치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주변이 온통 넝쿨과 잡목으로 둘러싸였다. 섬 주민 중 한 명이 이 섬에 멧돼지가 산다고 했다.





장도의 밤. 으스스한 섬 분위기와 달리 밤에는 아늑했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수라고 할 만큼 커다란 동백나무도 칡넝쿨을 당해낼 수 없었나보다. 온천지를 뒤덮은 칡넝쿨의 위엄에 감탄이 아닌 경악할 지경이었다. 길을 막은 넝쿨에 걸리지 않도록 발을 무릎 높이까지 올려야 했다. 신경이 온통 발길에 가 있던 순간 무언가 얼굴과 온 몸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나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말 그대로 기겁을 했다. 갑자기 제목도 모르고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칡넝쿨이 내 몸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아, 이렇게 당하는 건가?' 밑도 끝도 없는 희생자 코스프레 같지만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왔었다. 애꿎은 칡넝쿨만 악당 취급당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켰다. 반쯤 일어선 나의 몸에는 질긴 거미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군데군데 거미의 희생양이 된 정체 모를 벌레의 미라가 걸려 있었다. 이 정도 질기고 굵은 거미줄이라면 거대한 왕거미쯤 되리라. 순간 왕거미가 내 몸 어딘가에 붙어 나를 미라로 만들까 봐 소름이 끼쳤다. 벌떡 일어나 머리끝부터 발까지 온몸을 감싸고 있는 거미줄을 떼어냈다.



다행히 공포영화 속 엑스트라처럼 초반부터 독거미에게 당해 화면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주위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좁은 밭길에는 왕거미 아파트단지처럼 거미줄이 켜켜이 쳐져 있었다. 가능하면 거미줄을 피해 칡넝쿨을 밟고 지나갔다. 드디어 밭을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혼자 백패킹을 다니면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한 공포감이었다. 그리고 밭에서 지켜보던 거미와 메뚜기들이 '뭐야? 저 머저리는?' 하고 하찮게 봤을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길을 이어갔다.



구름버섯 발견! 운지버섯이라고도 한다.





섬을 탐험하다가 발견한 수레 바퀴. 버려진 지 오래된 듯했다. 바퀴 사이로 풀이 돋아나 있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아늑한 산책길이었다. 칡넝쿨에 뒤덮인 동백나무 가로수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의 길이 놓여 있던 것이다. 날이 좀 더 추웠다면 동백꽃이 수놓았을 예쁜 길이었다. 칡넝쿨에 뒤덮여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발전소가 생기면 버려질 섬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장도에 멧돼지가 산다고?
길을 걷다 섬 주민인 아주머니를 만나 인사했다. 거미줄 때문에 막대기 하나 주워 들고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기이한 얘기를 해주었다. 청산도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장도까지 헤엄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밤에 잘 때 먹이 찾으러 텐트로 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위성 지도를 보니 청산도에서 200m는 족히 떨어져 있는데, 가능한 일인가? 수심이 낮은 걸 보니 물이 빠지면 가능할 것 같긴 했다. 겁을 주려는 것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면 농으로 던진 말은 아닌 듯했다. '하생이가 있으니 멧돼지가 내려오면 짖겠지?' 하면서도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나이 70~80세 할아버지 개가 과연 멧돼지를 보고 짖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인간이여 언능 나를 안아 올려라!'라는 듯 몸을 꼿꼿이 세워 왼쪽 앞발로 우리 중 누군가의 무릎을 긁을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나에게 공포 요소를 하나 더 던져 주고 사라졌다. 나무를 하나 더 주워들었다. 틈나는 대로 나무를 탁탁 쳐 소리를 냈다. 섬 깊숙이 들어갈수록 멧돼지와 거미줄 생각만 하기에는 아까운 예쁜 길이 펼쳐졌다. 구절초와 이름 모를 야생화들. 그리고 그 위를 노니는 노랑나비와 호랑나비들은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 공포영화는 야생 다큐 모드로 전환됐다.



해가 지기 전 바다에 낚싯대를 던졌다. 볼락, 전갱이, 복어를 낚았다.





장도 뒤로 청산도가 보인다. 청산도는 전복 양식장으로 유명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끝섬까지 갈 수 있었지만 포기했다. 왠지 청산도와 가장 가까운 그 끝섬에는 진짜 멧돼지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멧돼지가 바다를 헤엄쳐 오느라 지쳐서 절벽은 내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끝섬은 미지로 남겨두기로 했다.
1시간 반 정도 서바이벌 트레킹을 하고 돌아왔다. 마침 낮잠에서 일어난 하생이 가족들이 섬 트레킹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세계 그 어떤 오지 트레킹 못지않게 스펙터클하고 재밌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낚시를 했다. 초보 낚시꾼들은 감성돔을 구경도 못 했지만, 볼락, 전갱이, 귀여운 복어까지 다양한 손맛을 보며 흡족해 했다. 그리고 다음 섬 여행을 기약했다.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과연 멧돼지가 바다를 건넌다는 게 사실일까?
"섬 주민이 '멧돼지가 청산도에서 장도로 헤엄쳐 왔다'고 해준 얘기를 반신반의했는데요. 아니! 정말 멧돼지가 바다를 건너는 사례가 있지 뭐예요?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말라가의 한 해변에 야생 멧돼지가 등장해, 피서객들 사이를 질주한 영상을 SNS에서 확인했어요. 가뭄으로 물을 찾아 해변으로 내려왔다가 너무 더워서 피서라도 즐겼나 보네요.
사례는 우리나라도 있습니다. 2019년 전북 부안군 격포항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해상에서 발견됐는데, 육지에서 위도 쪽으로 헤엄치던 중이었다고 하네요. 몸무게 60km의 거대한 멧돼지는 유해조수단에 의해 사살됐다고 합니다. 치사율 100%의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옮기는 주요 매개체가 야생 멧돼지라고 하니, 안타깝지만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렇다면 실제로 청산도에서 헤엄쳐 들어온 멧돼지가 장도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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