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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그랑~.” 여기 보세요. “댕그랑~.” 여기 종 치는 망부석이 있어요. “댕그랑~.” 사랑의 빨간 냄비도 있어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종을 친 지 27분째. 주름진 손이 냄비 앞에 쑥 나타났다. 반으로 접힌 1000원짜리 지폐 한 장.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낡은 회색 점퍼, 진 운동화 차림의 50대 남성이었다. “아, 저기…” 감사의 말을 전하려는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순식간에 사라진다. 왼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소자본창업대출 모를 속도로.
12월이면 전국 316곳 길거리에 붉은 구세군 기부 냄비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로 96년째. 가마솥을 나뭇가지에 걸어 서울 종로에 설치하고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외친 것이 시작이었다. 지난 24일 기준 전국 기부 냄비 모금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 적은 수준. 목표액의 1%가 모금되면 1도 오르는 광 심즈 프리플레이 직장 화문 ‘사랑의 온도탑’도 올해 목표액인 4497억원 달성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데.
길거리 기부를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리하여 이번엔 이브날의 구세군 자원봉사자가 돼 보기로 했다. 춥지 않았냐고? “고생해요~.” “호호, 메리 크리스마스!” “밥은 먹었고?” “학생이여? 안 추워?” 다정한 말들이 지폐와 함께 와르르 쏟아지는데, 추울 상가대출 새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크리스마스이브의 온기인가. 아이, 따듯해~.
‘The Salvation Army’(구세군) 문 원가계 구 적힌 붉은 롱패딩.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빨간 냄비 옆에는 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열차야, 빨리 좀 와주라
지난 24일 웰컴론 오후 4시, 동대문역 1번 출구 역사 안에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말 분위기 물씬~. 꼿꼿한 자세로 말없이 종만 치던 대학생 자원봉사자(일명 ‘캐틀메이트’) 김모(22)씨가 “교대하러 오셨느냐”며 ‘The Salvation Army(구세군)’ 문구 적힌 붉은 롱패딩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을 내밀었다. 동대문역 1·4번 출구에 각각 위치한 자원봉사자는 2시간마다 교대를 한다. 산하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 외에 구세군 본부가 직접 자원봉사자를 받는 모금 장소는 동대문역과 남부터미널, 교대역 등 총 3곳.
매뉴얼은 이렇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3~5초 간격으로 종을 칠 것, 행인의 길을 막거나 말을 걸며 기부를 강요하지 말 것.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도 안 한다. 대신 냄비에 돈을 넣으면 “감사합니다” 인사할 수는 있다. 8년째 구세군 관리 봉사를 하고 있는 이호영(32)씨는 “냄비 입구에 지폐가 끼었을 때 손으로 집으면 오해를 살 수 있다”며 “종 뒷부분 막대로 냄비를 톡톡 치면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댕그랑~.” 묵언 수행이 시작됐다. ‘의정부행 전전역 출발. 3분 후 도착 예정.’ 지하철을 이토록 기다린 적은 없을 것이다. 안내판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인천행 당역 도착.’ 드디어! 행인들이 몰려온다. 말을 걸 수 없다면 눈빛으로 말해주지. 종에 힘을 실어 흔들며 기부를 독려하는 강렬한 레이저 발사. “댕그랑! 댕그랑!”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땅만 봤다. 혹은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봤다.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는 행인을 볼 때마다 마음은 두근두근. 하지만 꺼내는 건 교통카드.
무려 QR코드를 찍어 기부 가능.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저기요.” 헛, 누군가 말을 걸었다. “길 좀 물을게요. 4호선 어디서 타요?” 진심으로 알려주고 싶었으나 나도 몰랐다. “화장실 어디 있어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가려면 어디로?” “Excuse me, where is the nearest bus stop?(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에 있나요?)”.... 5개 국어를 소화하는 ‘인간 내비게이션’이 된 이 기분.
◇적은 돈이 아니에요~
이러다 냄비 얼어붙겠다. “연말 분위기가 안 나네.” 누군가 스쳐 지나며 말했다. 몽글몽글 들뜬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지하철 안은 의외로 삭막. 반면 산타 모자나 루돌프 머리띠를 쓴 아이들은 신이 났다. “와, 빨간 냄비다!” “어? 구세군이다!” 부모님 손잡고 가던 아이들이 고맙게도 냄비의 존재를 알아봤다. 돼지저금통에 모은 동전을 가져와 혀 짧은 목소리로 “쪼은 데 써 주때여”라며 냄비에 쏟는 초등생도 꽤 있다고.
항아리도, 바구니도 있는데 왜 하필 냄비일까. 자선 냄비는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됐다. 한 구세군 사관이 배가 좌초하며 난민이 된 1000여 명을 돕기 위해 큰 쇠솥에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Keep the pot boiling)’ 문구를 붙여 부두로 나간 것이 시작이다. 오늘 이 솥, 끓을 수 있을까.
냄비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인 오후 5시 30분 무렵부터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젊은이들은 부끄럼쟁이였다. “감사하다” 말을 건넬 새도 없이 닌자처럼 비밀스럽게 돈을 넣고 사라졌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그때 밤색 롱코트를 입고 무스로 머리를 넘긴 한 신사가 냄비 앞에서 뒷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렸다. “1만원밖에 없네, 이거.” 세상에. 기쁜 마음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시냐” 물었다. 이현진(77)씨는 “이불 사려고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라며 “좋은 데 써 줘. 아까 현금 많았는데 써 버렸어, 미안해”라고 했다. 어르신, 무엇이 미안하십니까. 뒤이어 친구와 걷던 한 60대 남성이 다가와 1000원 뭉치를 넣는다. “저, 혹시…” 하니 손사래를 치며 쏜살같이 사라진다.
냄비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인 오후 5시 30분 무렵부터다. 슬슬 크리스마스 케이크나 선물 꾸러미를 들고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분위기 탓일까? 직접 떴다는 뜨개 모자를 쓰고 눈가 주름이 휘도록 웃으며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60대 여성, 자녀와 함께 되돌아와 주머니 현금을 털어 넣는 엄마들…. 딸이 “저거 뭐야?” 하니 “구세군이야~” 한다.
연령층은 다양했지만 50대 언저리나 그 윗세대가 주로 냄비 앞에서 지갑을 열었다. 관찰해 보니 1000원권과 1만원권이 많았다. 1000원 지폐 한 장을 냄비에 넣은 김영래(49)씨는 “작년까지 8년간 식당을 운영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며 “좋은 일에 써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부끄럽네요, 적은 돈인데…”라고 했다. 적다니요. 작은 성의가 모여 지난해엔 무려 21억6000만원이 모금됐답니다.
◇추울수록 불타오른다
젊은이들은 부끄럼쟁이였다. “감사하다” 말을 건넬 새도 없이 닌자처럼 비밀스럽게 돈을 넣고 사라졌다. 멀리에서 지폐를 준비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돈을 넣는 여성, “감사하다”고 하자 개미 목소리로 “예…” 하는 남성.
두툼한 검은색 패딩에 회색 목도리 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은 한 젊은 남성이 냄비와 약 20m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기부를 하고는 싶은데 뭔가 부끄러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한참 서성이다 순식간에 다가와 5000원짜리 지폐를 넣고 휙. 젊은 층이 적은 이유는 부끄럽거나, 카드나 삼성페이 등을 써 지폐가 없기 때문 아닐까.
봉사자인 대학생 원의선(22)씨에게 “힘들지 않느냐” 묻자 “다리는 안 아픈데 의외로 허리가 아프다. 그래도 이브날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돼 기분은 좋다”고 했다. 친구 3명과 함께 봉사를 왔단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봉사는 오후 8시쯤 끝났다. 배가 고파서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음성이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로 들릴 무렵이었다. 봉사자인 대학생 원의선(22)씨에게 “힘들지 않느냐” 묻자 “다리는 안 아픈데 의외로 허리가 아프다. 그래도 이브날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돼 기분은 좋다”고 했다. 친구 3명과 함께 봉사를 왔단다. 냄비를 흔들어 보니 묵직했다. 이 냄비는 모처에 있는 ‘구세군 금고’에 보관될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세군 안내판에 찍혀 있던 QR코드에 접속한 뒤 1만원을 기부했다. 구세군은 2012년 냄비 옆에 카드 단말기를 도입했으나 통신이 어렵거나 배터리 문제로 현재는 일부 휴게소 등의 지점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대신 QR코드로 간편하게 기부 가능.
1997년 외환 위기 때 모금액은 13억4059만원으로 전년(12억2487만원)보다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이 더 보이기 때문 아닐지. 약간 침울한 연말이지만 추울수록 주문을 걸어본다. 냄비야 불타올라라, 파이어~!
기부를 독려하기 위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조유미 기자.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 기자가 "연말인 만큼 미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신문 기자는 카메라가 어색하다. 댕그랑댕그랑~ 댕그랑댕그랑~.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